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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의 생각, 나의 삶

왜 블로그/인스타그램에 글을 포스팅하기로 다짐하였는가?

20210108

1. 자기계발

어느 하나에 죽도록 미치지 않는 이상, 무언가를 꾸준히 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운동. 어디 병든 곳도 없이, 어떠한 극심한 열등감 극복이 목적이 아닌, 단순히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한다면, 사실 오늘 하루의 운동은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동기가 너무나 떨어지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꾸준히 하는 것이 이롭겠으나, 동기가 강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러한 부류의 자기계발에 대하여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나에게 독서, 글쓰기, 오래 달리기, 성실한 습관 등이 그러한 것이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꾸준히 해나가기 위해서 블로그/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아무래도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 성취를 가시화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이 연료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나만의 포트폴리오 창조 (자기 브랜딩)

블로그/인스타그램(부계정)은 내 삶의 가시적인 기록이다. 평소에 SNS를 하지만, 이곳에 나의 독서, 나의 깊은 생각, 운동 목표 등을 올리기엔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내 이름이 걸려있기에 자유로이 기록할 수 없다. 2017년부터 3년 반 정도 꾸준히 독서를 하고 있지만,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나의 내면에 존재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의 성장 과정을 내 눈으로 다시 지켜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남에게 보여주어 일말의 귀감이라도 되었으면 좋으련만. 이러한 후회를 기회로 삼아, 2021년 지금부터라도 기록을 시작하기로 다짐했다. 겨우 25살 밖에 되지 않았으니, 내가 만들어갈 역사는 매우 길 것이고, 언젠가 나의 포트폴리오가 주목받는 날이 오겠지.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주목할 기회조차 주지 못 한다.

3. 남에게 보여주는 글쓰기

지금까지 대부분의 글은 오로지 나를 위한 글쓰기만을 해왔다. 나의 글쓰기 노트가 아주 빽빽이 채워져 있지만, 이제 와서 둘러보니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글이 없다. 왜냐하면 먼저, 형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당시에 내 생각에 빠져 있어서 그것을 표현하느라 형식을 고려하지 않았음은 십분 이해되긴 한다. 둘째로, 완결되지 않은 글이 대부분이다. 오직 나를 위해 글을 쓰다 보니 중간에 제멋대로 끝나버리는 글이 많다. 그 당시의 감정을 모두 표출해냈으면 글쓰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글쓰기에는 자기해소 뿐만 아니라, 공유의 목적, 정리의 목적도 존재한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남에게 보여주는 글쓰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이것의 이로운 점은 자기검열이다. 나 자신만 보는 글이라면, 자기 검열할 유인이 많이 없다. 내가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로, ‘가슴을 찢는 듯 한 아픔’을 단순히 ‘아픔’이라고 표현하여도 나는 나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가슴을 찢는 듯한) 아픔이었구나 하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표현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단어도 고민하여 사용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어휘력도 상승하지 않고, 문장력도 좋아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글이라고 하면, 일단 독자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수없이 고민하고 서술하는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레 모든 것이 좋아진다. 나와 독자 둘다 충실히 고려하여 글을 써나갈 필요가 있다. 장래에 책을 저술할 계획이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과정이다.

4. 한 사람에게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

나는 자주 ‘돈오(頓悟)’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깨달음 속에 산다. 배우는 것도 좋아하고 이를 체화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책을 읽고, 멋진 사람들에게 배우고 나 자신이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다. 최근에는 철학에 빠졌다. 이전에는 소설을 읽으며 딱히 깊은 철학을 접하진 않았다. 소설 속에 철학적인 내용이 심오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고, 그저 스토리에서 감명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감동을 오랫동안 받아와서 무뎌졌기 때문인가. 더욱 심오한 것을 원하게 되었고, 어쩌다 <실존주의>를 공부하였다. 그 과정에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었고 -물론 카뮈는 자신의 책을 철학서라 칭하지 않는다. 에세이에 가깝다. 세간에서도 실존주의를 하나의 철학이라고 보지 않기도 한다-, 정말 깨달은 것이 많았다. 어느 정도 정체되어 있던 독서와 깨달음이었는데 그 간극을 뛰어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알베르 카뮈의 이 철학을 공부해보지 아니하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너무 아쉬우리라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삼국지를 읽지 않은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는데-물론 나는 읽지 않았다-, 나는 알베르 카뮈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나의 생각과 깨달음과 글이,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길 바라면서 글을 쓴다.

5. ‘나’라는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출판할 적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을 이용하였다. 세간에서 이미 성공한 작가로 평가받던 헤르만 헤세는 그 평판 때문에 자신의 책이 읽히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평판을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작가 이름으로 출판하여서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성공한 평판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헤르만 헤세와 같은 마음이다. 내 글의 독자는 대부분 나를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밀 것이며, 이는 좋아요 수, 팔로워 수, 이웃 수로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인정을 받는다면 당연히 좋을 테고, 인정받지 못 하더라도 좋을 터이다. 부족한 면을 인식하는 계기일 것이고, 나를 수정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표현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