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Woman in the dunes), 아베 코보 (安部公房)
어느 날, 학교 선생인 한 남자가 곤충 채집을 위해 사구(沙丘)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은 생명의 근접을 허용하지 않는 땅, 사구에서도 모질게 살아남은 곤충을 채집하여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려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여행은 남자 스스로를 질긴 생명력을 가진 곤충으로 변신하게 하였고, 이 세상에서 그의 이름은 실종되고 만다.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남기고자 한 그의 행위가 그 자신을 채집함으로써 완성되는 대신,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너무나 부조리(不條理)하지 않은가. 인생의 부조리함을 다룬 책,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를 소개한다.
“인생은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이다.”
인생의 본질을 논하기 좋아하는 나로서 이는 매우 흥미로운 구절이었다. 뫼비우스의 띠란 안팎의 구별이 없는 도형이다. 대입해보면 인생에서 안과 밖의 구분은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안’이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이야기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안’은 ‘사회성이 좋지 않은,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생물 선생생활’이다. ‘밖’은 자신이 지향하는 공간으로, 사구이다. 학교 선생님으로서 특별할 일 없는 삶을 살아가며, 꾸준히 퇴사를 고민한다. 휴가 때는 사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곤충 채집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자신이 처음 발견한 곤충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한다. 그러다 휴가를 얻어 그토록 원하던 사구로 향하지만, 사구에서 길을 잃게 되고, 우연히 한 여인의 집에 머물게 된다. 사구에 있는 집이기에 물을 마음대로 쓰기 어렵고, 자고 나면 자신의 몸에 모래가 쌓여 있는 기이한 장소이다. 불편함과 함께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자 하나,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사구에 위치한 마을이 유지되려면, 매일 매일 쌓이는 모래를 퍼내야만 하였는데, 마을 사람의 계략에 빠져 모래를 퍼내는 노역을 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안팎이 바뀌었다. 이제는 ‘사구’가 ‘안’이고, ‘밖’이 선생생활이 되었다. 선생생활을 싫어하고 퇴사를 희망했으며, 사구를 열망했던 주인공은 모순적이게도 이제는 사구에서 얼른 튀어나가서 교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과연 이것이 소설 속 이야기이기만 할까. 작가 아베 코보는 실존주의적 사상을 가진 작가이고 이 소설을 통해 무언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몇 해 전, 알랭 드 보통이 언급한 낙원에 대한 생각에 깊이 빠져있던 적이 있었다. 우리는 현재를 절대 낙원으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낙원은 미래 또는 과거일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고등학생일 적에 대학생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너무나 우스웠다. 대학생이 되고 난 후, 학기 중에는 방학을 바라고 방학 중에는 학기를 바라는 부조리함이 또한 우습고 충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현재, 또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우습다.
소설 속 사나이 또한 이 부조리함을 인지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자신이 증오했던 것을 왜 다시 갈망하게 되는 것인지. 그리고는 인생은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을 깨닫는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본인만이 존재한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같다. 이후, 사나이는 우연히 사구에서 탈출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도 혐오했었던, 이후엔 갈망하기 시작했던 바깥세상으로 나갈 절호의 기회이다. 잠깐 바깥세상에 유혹을 느끼지만, 인생이 뫼비우스의 띠임을 인식한 사나이는 놀랍게도 기회를 잡지 않는다.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공간에서 영원히 존재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우리는 안에 있으면서 바깥을 동경하고, 동경을 찾아 안을 버리면 그 밖이 다시 안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때에 세상이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 더 이상 바깥을 동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실성을 가져다준다. 희망을 꺾어준다. 때로는 희망은 질병과 같으니까. 안과 밖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내가 있는 여기, 이 세상만이 존재할 뿐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나면, 여기 이 장소에서의 나를 온전히 살아낼 토대를 드디어 마련하게 된다. 지금을 충분히 살아가는 방법은 먼저 지금 이곳이 충분히 좋은 공간임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할 테니까. 방학과 학기, 학창시절과 어른 등 두 가지 세계를 동시에 증오하며 사랑하는 우리가 살아가야할 방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다른 세계를 꿈꾸느라 바로 여기가 다른 세계임을 자각하지 못 하는 절대적 모순을 사는, 그리하여 늘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다른 세상이란 태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한 후, 현존재(現存在)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론은 “Carpe diem“이고,”오늘을 살자“로 귀결된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결론이고, 내 인생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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