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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알베르 카뮈)를 읽고

행복한 시지프 2022. 2. 15. 17:35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목차

1. 부조리의 추론

1.1. 부조리의 정의

1.2. 부조리를 맞는 자세 : 희망, 자살

1.3. 첫 번째 귀결 : 반항

1.4. 두 번째 귀결 : 자유

1.5. 세 번째 귀결 : 열정

 

2. 부조리한 인간

2.1. 예술가적 창조

2.2. 시지프 신화

 

 

1. 부조리의 추론

 

 

1.1. 부조리의 정의

 

데카르트는 단 하나의 확실한 것을 ‘의식’(cogito)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만이 단 하나의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확실한 것만을 견지하며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부조리(不條理)란 무엇인가? ‘조리‘라는 말은 언제 사용할까?

글이나 말의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것에 대해 조리 있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부조리하다는 것은, 어떤 관계 속에 체계가 없고, 무언가 들어맞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가 지적한 부조리는 바로, 인간과 세계간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확실함에 대한 열망과, 세계의 비합리성간의 대립이다. 인간은 확실함을 원한다.

일상 속에서 찾아보자면, 인간은 불안감을 견디지 못한다.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로 관통되기를 바란다.

인간은 무얼 위해 태어났는지 항상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며, 억지로 답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플라톤부터 이어져온 보편주의(cf. 실존주의)의 역사이다.

카뮈는 이것이 또한 종교의 역사라고 말하며 무신론적 입장을 취한다.

 

 

인간의 확실함에 대한 열망이 존재하는 반면, 실은 삶에 하나로 귀결되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불확실함 속에서 살아가며, 인간이 태어난 목적 따위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부조리함을 느끼고 좌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카뮈의 말을 빌리자면, ‘공허가 웅변적이 되고, 일상의 판에 박힌 행동을 이어 주던 끈이 툭 끊어지면서 마음이 그 끈을 다시 이어 줄 매듭을 찾으려 해도 헛일이 되는 그 기이한 상태’라고 부조리의 징후를 표현한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간격을 인식하고, 그 틈이 거대해 보이고(웅변적이 되고), 졸지에 그 연결은 태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매일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지만, 일순간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과 같다.

성공, 선, 학벌, 영원한 사랑, 영원한 만족에 매달려서 살아가지만, 어느덧 대체 무얼 위해 이들을 좇고 있을까 의문이 생기는 때가 온다.

그것이 ‘절연’을 경험하는 것이고 부조리를 인식하는 출발점이고, 카뮈는 오로지 이 부조리만이 삶에서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하였다.

 

 

1.2. 부조리를 맞는 자세 : 자살, 희망

앞에서 부조리의 정의를 서술하며 ‘이 세상은 무엇인지?’에 대해 답을 내렸다면(1.1. 부조리의 정의), 당연지사 ‘이러한 세상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하는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1.2. 부조리를 맞는 자세, 1.3. 반항, 1.4. 자유, 1.5. 열정) 알베르 카뮈는 이런 순서에 따라 서술하였고, 그 뒤에는 귀납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예시를 서술한다.(2.1. 예술가적 창조, 2.2. 시지프 신화) 카뮈의 ‘작가 노트’에서 알 수 있듯이, 카뮈는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다. 글을 쓰기 전에 어떤 글을 어떻게 써나갈지에 대한 체계를 미리 짜두고 글을 쓰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이러한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알베르 카뮈는 한 없이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최소한 알베르 카뮈가 완벽한 논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나의 진리들 가운데 첫째가는 것‘이라고 표현하였고, 이를 토대로 모든 논리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부조리는 인간의 열망과 세계의 침묵 간의 양자 관계이다. 그러니까, 인간-세계-부조리를 ’삼위일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중 하나의 항이라도 파괴되면 그것은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이 된다. 부조리가 곧 진리이며,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니, 이것을 은폐해서는 안 되고, 이 논리를 부정하는 행동 또한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부조리를 맞는 자세는 부조리를 견지하는 자세여야만 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첫 번째는 자살, 두 번째는 희망, 세 번째는 반항이다.

먼저 이 무의미를 없애기 위해, 자살을 행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언젠가 죽어버릴 삶이고, 불안하며, 제멋대로 되지 않는 삶에서 일찍이 생을 마감해버리는 것도 고려의 대상일 수 있다. 카뮈는 허무주의 속에서도 자살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데, 이 논리가 매우 흥미롭다. 통상 왜 자살해서는 안 되는가가 화두가 될 적에,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라거나,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라거나, 살아야할 이유가 더 많다거나, 하는 이유가 나온다. 카뮈가 굉장히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게,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부조리를 견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자살하지 말라’는 행동강령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고, ‘자살하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듯, 첫 번째 가는 진리가 부조리이고 부조리를 견지해야만 진리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조리는 인간-세계-부조리의 삼위일체이다. 자살하는 행위는 인간 자체를 없앰으로써, 부조리 자체를 폐기시키는 행위이다. 즉, 자살은 진리를 파괴하므로 논리적 귀결이라고 볼 수 없다. 즉,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선택적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자살자의 반대는 사형수다. 즉, 자살하지 않고자 하는 우리 모두는 죽음을 직면한 사형수다.

부조리에 맞서는 두 번째 행위로 ‘희망’이다. 먼저 희망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에 대해 고찰하고 싶다. 희망이라는 말은 대개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표현이다. 하지만 과연 긍정적이기만 할까?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에서, 상자 속에 온갖 부정적인 것이 섞여 있었는데 그 속에 희망이 함께 있었다. 희망이 부정적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미래를 꿈꾸는 것, 더 나은 사람을 만나리라 꿈꾸는 것, 영원을 꿈꾸는 것, 내세를 꿈꾸는 것. 모두 더 나은 삶을 위한 긍정적 희망이라고 볼 수 있으나, 치명적으로 이들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 하도록 만든다. 미래를 꿈꾸느라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 하고, 더 나은 사람을 생각하느라 현재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마음을 다해 대하지 못하고. 카뮈는 이런 부정적인 희망을 언급하였다. ‘희망이란 현재의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에 어떤 의미를 주어 결국은 삶을 배반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라고 말한다. 부조리는 인간-세상 간에 일관된 통일성이 없다는 데에서 기인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거창한 관념’을 만들어 의미부여 함으로써 통일성을 창조하는 행위를 희망이라 부른다. 주로 종교적인 것에 치중되는데, 카뮈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므로 ‘신’을 믿는 행위를 희망이라 일컫는다. 이에 대해 ‘철학적 자살’이라고 한다. 희망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부조리를 은폐시키고, 도피하며, 논리적 비약을 저지르는 행위라고 본 것이다. 통일성을 추구함으로써, 부조리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희망 또한 논리적 귀결이라 볼 수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행위를 카뮈는 철학적 자살이라 칭할 것이다. 성공을 위해, 선을 위해, 신을 위해, 사랑을 위해, 살아가고 그것들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는 거창한 관념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조리에 맞서는 행위는 오직, 인간-세계-부조리를 모두 견지하는 행위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반항’이다.

 

1.3. 첫 번째 귀결 : 반항

1.4. 두 번째 귀결 : 자유

1.5. 세 번째 귀결 : 열정

 

카뮈에게 진리란 부조리뿐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진리를 견지하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자신을 죽임으로써 부조리를 폐기하는 자살과 구원을 호소하는 등 희망을 가짐으로써 세계를 은폐하는 행위를 거부하였다.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부조리를 온전히 지탱하며 ‘반항’하는 행위만을 인정한다. 더 이상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뮈는 이에 대해 “비통하고도 멋들어진 내기”라고 표현한다. 이게 논리적 귀결이라면, 시원하지만 너무나 비통하지 않은가

‘반항’은 맞서 싸운다는 의미이다. 다시 상기해보면, 부조리란 인간의 확실함에 대한 열망과 세계의 비합리성간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불안함을 가져다주는 비합리적인 세계에 굴복하여 죽어버리거나, 삶은 조리하다고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고, 부조리를 붙들고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임을 ‘명증히’ 인식하는 것이 반항의 첫 번째 임무이다. 단지 죽음에 대해 피상적인 관념을 취하는 것에 ‘명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고 절실히 느끼는 시한부이며, 사형수가 되어야 한다. 죽음을 인식했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대담히 직면하는 것이 두 번째이다. 이것은 운명을 당당히 받아들인 자만이 가능할 터이다. 운명을 부정하지 않고, 희망을 찾지 않는 당당한 자.

반항은 곧 희망과 미래의 박탈이다.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말살한다. 남은 것은 오로지 현재의 가능성뿐이다. 여기서 부조리의 두 번째, 세 번째 귀결이 파생된다. 반항하는 자는, 현재에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열정을 가지게 된다. 카뮈가 말하는 방식이 매우 마음에 드는 것이, 언제나 작위적이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게 살아야한다’,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명제 하에서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귀결을 내놓는다. 여기서도 ‘반항하라’, ‘자유를 누려라’, ‘열정을 가져라’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부조리하다는 참인 명제 하에서, 죽음을 명증히 인식하고 반항하는 것만이 논리적 귀결이며, 그런 자는 자유와 열정을 가지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죽음을 직면한 자는, 현재에 잔존하는 모든 가능성을 살아내게 된다.

카뮈는 29세에 시지프 신화를 저술했다고 한다. 그 만큼 젊음의 패기가 느껴진다. 부조리에 대한 논리적 귀결로 ‘반항’을 언급하였으니 말이다. 죽음에 직면하는 행위가 얼마나 가능할지 의문이지만, 카뮈 또한 이를 가볍게 바라보지 않았다. 심지어 비통하고, 불안하고, 힘겨운 여정임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우리 주변으로 잠깐만 눈을 돌려봐도 알 수 있다. 죽음을 직면하는 과정부터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니, 반항, 자유, 열정을 실현하고 있는 자를 떠올리기 어렵다. 니체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인물을 ‘초인’이라 칭하였고, 카뮈는 ‘창조자’라고 칭하였다.

 

2. 부조리한 인간

 

2.1. 예술가적 창조

2.2. 시지프 신화

카뮈는 부조리를 제일의 진리로 보았고, 그 논리에 따르면 반항, 자유, 열정으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카뮈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이를 부조리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다르게 말하면, <부조리를 명증히 인식한 인간>이다. 카뮈는 친절하게도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이 부조리를 인식한 삶일지 서술하였다. 바로 창조자이다. 카뮈만의 창조자 개념은 2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다.

창조자는 먼저 영원을 잃어버린 자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통일성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고, 내세를 떠올리지 않고, 영원을 갈망하지 않는다. “시간과 더불어 살고 시간과 더불어 죽는다” 오로지 현재에서 창조한다. 두 번째로 무의미함을 인식하면서도 창조해나가는 자다. 지금 창조하는 행위가 어떠한 것도 해결해주지 않고, 이것이 영원히 남아 미래의 누군가에게 기억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영광이란 모두 덧없는 것이다. 시리우스의 관점에서 보면 괴테의 작품들도 1만년 후에는 티끌이 될 것이고 그의 이름이 잊히고 말 것이다” 카뮈는 괴테를 매우 존경했을 것이다. - 이러한 부분에서 카뮈가 니체의 사상을 존경했음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일까? 니체는 대부분의 철학자/문학가를 비판하였지만 괴테를 존경하였다 – 하지만 괴테의 작품조차 영원히 남지 못 할 것이다. 언젠가 사라져 버리고 말 무(無)를 창조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진흙으로 조각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

니체와 카뮈가 간혹 무지한 자들에 의하여 허무주의라고 오해받는다. 그것은 바로 출발점이 허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그 허무가 자유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긍정과 열정으로 귀결된다. 관련된 이야기로,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서술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시지프는 신에게서 <영원히 산 정상에 바위를 끌어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산이 뾰족하여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리도 무의미한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카뮈는 바위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질 때, 웃으며 내려오는 시지프를 상상한다. 그가 바로 창조자이다. 자신의 운명을 비난하지 않고, 언젠가 끝나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인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품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