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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의 생각, 나의 삶

학문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

최근 다시 대학에 돌아와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다. 막학기인지라, 내가 원하는 과목들을 들으며 아주 즐겁게 학문을 하고 있다. 경제, 컴퓨터과학, 철학 과목들을 수강 중이다. 다양한 과목들을 근본부터 들으니, 어떻게 학문을 대해야 하는지, 좋은 생각이 솟구친다.
 
나의 현 상황을 서술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현대 프로그래밍 언어는 잘 다룰 줄 아는데, 컴퓨터과학의 근간인 기계어, 어셈블리어, C언어 등은 잘 모른다. 나는 현대 철학인 실존주의에 대한 이해는 높은 편인데, 고전철학, 근대철학에는 그렇지 않다. 나는 SQL 은 다룰 줄 아는데, 데이타베이스 이론은 잘 모른다.
 
위 사례들이 잘못 되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실용주의적, top-down 학습법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현대적 쓰임새를 알고, 역사와 근본을 학습할 때 비로소 그것들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 근본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하고, 어떤 자세로 학문을 대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컴퓨터과학에서 C언어를, 철학에서 플라톤, 데카르트를 대학교 1학년 전공기초로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에 거의 쓰이지 않는 역사적 지식들, 근본적 지식을 왜 알아야 할까.
 
바로, 그 시대에 마주한 문제상황과, 문제해결 과정을 배우기 위한 목적이다. 그 시대의 지식 수준, 문화라는 제약 조건 하에서,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떤 해결책을 떠올려서 문제를 해결했는가 를 이해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대체 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는 말을 하며, 인간의 의식만을 유일하게 확실한 것으로 도출했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말 자체는 과장해서 표현하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내 존재를 알게 해주는 것은, 내 생각만이 아니다. 심장이 뛴다는 것, 신체를 가진다는 것 등 다른 이유가 제시될 수 있다. 데카르트가 살았던 1600년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이었고, 코페르니쿠스 등의 과학자가 이 세계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종교개혁이 일어나며, 여러 사회적 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데카르트가 진행한 프로젝트의 결과가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였다. 그 주장까지 가는 데 있어서, 방법적 회의, 토대론, 오류불가능주의 등 흥미로운 방법론들을 사용한다. 단지 해결책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데카르트의 아이디어와 컨셉을 배우는 것이 진정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왜 의미가 있을까? 여러 문제해결 컨셉과 테크닉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자신이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자신의 역량을 표현한 circle 이 있다고 하면, 이는 circle 의 면적을 넓히는 일이다. 우리가 더하기를 배우니 빼기를 할 수 있게 되고, 시키지 않아도 곱하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배운 문제해결 과정을 우리의 삶 어디서든 사용하여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 사회 혼란 속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석판명한 것을 찾으려고 했던 데카르트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까? 자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까? 과학적 사고에 적용할 수 없을까? 모두 가능하다. 즉,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여러 정반합을 거쳐서, 지금까지 오게 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학문을 대할 때, 두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강조하고 싶다. 첫 번째는 그 때의 제약조건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 두 번째는 결론이 아니라, 해결과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을 그냥 먼 이야기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된다. 기원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그 시대에 빠져들어야 한다. 내가 현재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여, 유신론적 주장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 시기의 지식 수준은 어땠으며, 어떤 문제 상황이 있었고, 해결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고, 얼마나 고군분투하여 해결책을 떠올렸으며, 그것이 당대에 얼마나 멋진 컨셉이었고, 최선의 선택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 측면에서 나는 천동설도 충분히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은 천동설은 믿었대요” 처럼 우스운 말이 없다. 다름에 주목하는게 아니라, 그들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것이 배움의 출발점이다. 천동설의 논리도 상당히 탄탄했을 것이다. 그리고 천동설의 발전이 곧 지동설을 만들었음에 나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은 안개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 한다. 누가 더 맹목적인가? 레닌에 대한 시를 쓰면서 레닌주의가 어떤 귀결에 이를지 몰랐던 마야코프스키인가? 아니면 수십년 시차를 두고 그를 심판하면서도 그를 감쌌던 안개를 보지못했던 우리인가. 마야코프스키의 맹목은 영원한 인간의 조건에 속한다. 마야코프스키가 걸어간 길 위에 안개를 보지 않는 것, 그것은 인간이 뭔지를 망각하는 것이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 선택에 있었던 안개를 고려하지 않고, 판단하는 것만큼 비인간적인 것은 없다. 그러한 냉소는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행위이며, 배움도 안겨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때의 안개를 그대로 재현하여 상상하며, 위인을 대하고, 학문을 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들이 단지 괴짜가 아니라, 문제해결사로 보이고, 그들의 유려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